오일간의 해방
5일간의 해방
나의 유년(幼年)을 회고하여 본다. 세월에 바래기 전의 나의 원형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다. 오십여 년 넘게 인간 군과 사회에 적응해온 나의 유년은 Survival 도구로서의 온갖 것을 그에 덧붙여왔지만 배우기 전의, 물들기 전의, 훈육되기 전의 야생의 내가 가끔 내 안에 살아있는 걸 느끼며 그걸 한번 잡아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권용석 이사장이 사비를 털어 마련한 사단법인행복공장의 홍천감옥 속에 나를 오일간 가두면서, 나는 잠시 나의 유년의 영혼을 온갖 세속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킬 기회를 가졌다. 그 오일간 무엇이 보이든 나를 한번 들여다보기로 하고, 이 짧은 기간에 목격한 나를 기록한다.
첫째 날의 기록
입소한 첫날 내게 주어진 노역(勞役)은 무작정 앉아서 눈을 감고 내 안에 있는 과거의 모든 기억들을 샅샅이 드러내보라는 것이었다. 교정교육을 담당한 천주교신부님은 기억을 드러내고 나서, 다시 버리라고 지도하신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내놓기는 해도 말대로 잘 버려지지는 않았다. 일단 버리는 시늉만 하고 내 안의 온갖 기억을 유년의 것부터 시간의 순서에 맞춰 회고한다. 나는 기억을 버리는데 집중하는 대신, 도대체 내가 과거를 회고하는 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볼 작정을 하였다
명상에 들어간 첫날, 나는 고향 유년의 일들, 공덕동과 봉천동에서의 2년, 창동과 방학동의 70년대를 회상하였다. 도봉산 밑에서 가족이 농사짓던 일, 하루 아침에 논과 밭이 사라지고 마을에 도시가 들어오던 일, 그 도시건설 현장에 벽돌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가 갑자기 죽던 일, 고교를 들어가고 대학을 들어가고 취직을 하고 공부를 하고 결혼을 하고,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그 많은 일들이 다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인 듯 실타래처럼 생생히 피어 올랐다. 시설 입소 첫날의 작업은 이렇게 끝났다.
둘째 날의 기록
어제 한 회상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 그러고 나서 더 조용히 다시 또 반복한다. 그 모든 일들은 지금 눈 앞의 일처럼 더 생생해지고 첫날 떠오르지 않던 일들까지 생생히 일어나 뜨문뜨문했던 틈을 메우며 완벽한 일대기가 재생되고 있다. 나는 여전히 버리지는 못하고 살펴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같은 일을 이틀간이나 반복하고 있던 나는 정말로 의심스러운 일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나의 이 모든 기억은 완벽한 허구였던 것이다.
셋째날의 기록
내 안에서 기억 회상의 홍수와 함께 밀려온 의심을 확인하는 하루였다. 내 안의 과거의 기억은 모두 내가 몸소 경험하여 얻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 기억들은 내가 경험한 그대로는 아니었다. 그간 떠오는 형상과 풍광이 내가 당사자로서 경험한 그대로가 아니라 제3자적 관점의 조감도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일관되게 멀리서 본 조감도이다. 내가 하늘로 날아올라 마을을 쳐다보기라도 했던 것일까? 더군다나 과거의 기억은 완벽한 흑백이다. 내가 기억을 되뇌면서 색깔을 구분해 내기는 해도 그것은 관념적인 가공이고 사실은 아니었다. 그 어디에서도 색깔은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나는 보고 경험한 것을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염두(念頭)에 떠오르는 상(像)의 실체는 무엇일까? 내가 회상해 낸 그 조감도적인 마을풍경이 내가 당사자로서 실제로 경험한 기억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가부좌를 고쳐 다잡고 염두의 고삐를 죄어본다. 그 풍경을 다시 떠올리고 출처를 추측한다. 떠올리고 떠올릴수록 과거는 완결성이 높아가고 그 비인 자리들이 채워져 더욱 생생해 지고 있다. 조용한 저녁나절 풀벌레 우는 고요한 수양실에 앉아 살피고 살핀 끝에 나의 염두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떠오른 모든 과거는 허구이고 상상이다. 거기에 동원된 모든 사물은 내 머리 어딘가에, 언제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내가 사물을 지각하기 시작했을 때 경험하여 이미 마련된 소품들에 불과하다. 논두렁도, 들판도, 초목도, 하늘도, 심지어는 내가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까지도 소품들이 동원되어 재생된 것에 불과하다. 나는 이것을 염두에서 일어나는 공연이라고 부르고 싶다. 상상이라고 하여도 좋고 꿈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넷째 날의 기록
아침이 되어 백팔 배를 마치고 이번에는 눈을 감고 과거를 떠올리는 대신 눈을 뜨고 창 밖의 눈부신 자연을 내다봤다. 회상이나 상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생함과 현실감이 거기에 있었다. 화려한 색깔도 보였고 형상들도 또렷했다. 현실감각은 감각기관과 염두 사이에 존재하며 염두와 기억의 코드나 소품실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인 듯 했다. 눈을 감고 방금 본 것을 회상한다. 색깔이 있고 생생하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은 있어도 양심상 그것은 여전히 흑백이고 또렷하지도 않다. 눈을 뜨고 보는 사물은 어찌 그리 생생한가. 그런 사물이 눈만 감으면 내 마음에서 어디로 사라지고 다시 소품이 등장해서 그 사물을 대체하는가. 내가 지각하는 사물은 내 안에 들어와 사물 그대로 기억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내가 지각을 열어놓는 동안 사물을 느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사물과 빛은 내 안의 소품들이 염두에서 일으킬 공연의 코드를 마음에 각인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그 순간에도, 내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지각하는 대신 사물이 내 안의 소품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불과하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들기까지 하였다.
아침을 마치고, 내친김에 오늘은 차분히 내 속에 들어 있는 말(언어)이 어떤 형태로 염두에 공연이 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단어 하나 하나를 염두에 올릴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살핀다. 아마 내가 유년 이후에 원시의 나를 변형해 오거나 덧붙여 온 것이 있다면 아마 이 영역일 것이라는 막연한 의심을 하면서.
단어는 대부분 한 번에 염두에 떠오르는 기본단위이다. 어떤 단어를 염두에 떠올리면 어떤 상(상)이 연이어 염두에 끌어 올려진다. 어떤 단어는 염두에 오를 때 특이한 감정을 유발하기도 한다. 귀를 여는 단어도 있다. 대부분의 직결적 단어들은 감각과 기분 변화나 느낌을 유발한다. 그런데 이러한 단어들이 쌓여있는 구조는 상당히 피라미드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대부분의 단어가 염두에 직결적인 감각적 공연을 일으키는데, 단어가 직결의 감각을 일으키는 대신 다른 단어를 물고 오거나 여러 단어를 몰고 올라와 묘한 분위기를 연출할 때도 있다. 이 기본단위의 코드들은 복잡한 실타래로 얼기설기 엮여있는 듯 보이고 염두에 공연될 때는 몇 가지 틀에 맞춘 관성에 따른다. 내 안에서 발견된 그 틀들은 틀림없이 그 간의 교육을 통하여 형성된 버퍼 같은 가공공간이다. 단어들을 다발로 묶어내는 단어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 모든 복잡한 구조의 축적은 염두의 물리적인 한계치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 보이고, 단어들은 뇌 어딘가에서 감정과 감각이 소통하는 통로들의 다발을 묶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고리들을 다발로 묶는 다른 차원의 고리들도 존재한다.
이러한 것들이 오전 중에 염두(뇌리)에 떠올랐다. 이러한 구조물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뇌 내에 형성되었을까 하는 의문에 답이 오지는 않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이 모든 것들이 염두와 거미줄처럼 엮여있고 생각의 과정에서 그 각 조합 또는 세트들이 번개처럼 활성화를 번갈아 하고 있다는 것이 관찰되었다. 아무리 실험을 하여도 나의 염두는 1분 후에 거기에 무엇이 담기고 무엇이 공연될 지 예측하지 못하였다. 1분이 아니라 염두에 오르는 개별적인 생각의 순서는 정말로 우연적이라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개울물을 가두어 흘리는 개천과 같이 염두에 공연되는 순서의 개괄을 결정짓는 생각의 홈도 있는 것 같다. 염두에 상이나 관념을 떠올리는데 작용을 하는 여러 단위의 일관된 힘들이 3차원의 공간에서 너울대듯 생각하는 동안 활성화한다. 아무리 긴 진술을 담는 문장과 글도 조그맣고 단순한 볼펜의 끝의 움직임의 궤적에 불과하듯, 감정과 정서와 관념은 머리 안에서 섞이며 염두에 즉흥적인 공연이나 연주를 하고 있었다. 생각과 생각, 단어와 단어의 발현을 규율하는 어떤 패턴 중에서 내가 관찰한 것 들 중의 하나는 내가 아는 ‘이성(理性)’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 족한 종류의 것들도 있어 보인다. 더불어 이 이성에서 나오는 추리가 뼈대로 구성된 스토리(STORY)는 공연의 대본을 만드는 가장 강력한 흐름의 틀이었다. 이 것이 염두에 오르는 것들의 틀이라면 감정은 그 색채이고 소리이다.
나는 잠시 생각한 후에 감정 또는 기분의 가장 분화되기 전의 원형을 ‘좋다’, ‘싫다’로 나누고 싶어졌다. 나의 원형은 그것만 가지고서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염두에 그 어떤 사물의 상을 넣어도 자연적으로 ‘좋다’, 또는 ‘싫다’를 일으키는 공명이 일어난다. 관계를 상정하고 사물간의 스토리를 공연하여도 역시 같은 베이스가 동시에 연주된다. 심지어는 추상적인 관념에도 호-불호가 붙어있다. 백팔번뇌나 오만 가지의 기쁨도 이 좋은 기분과 나쁜 기분의 잔뿌리에 불과한 것 같다. 이 원형의 감정은 경험과 사유와 생활을 해오는 동안 분화되고 자라나온 것이 분명하다. 나는 내 안의 번뇌가 어디에 어떻게 깔려있는지를 관찰하였다. 어떤 좋은 기억들은 밝은 곳에 가서 주제별로 쌓여 있다. 그러나 불쾌한 기억들은 불편하고 칙칙한 곳에 그룹을 지어 매달려 있다. 썩은 곳에서 나오는 기억은 악취를 풍기며 등장하고 기분이 나빠질 때에도 나쁜 기억이 나온다. 염두가 우연히 이 루트와 짝을 이루며 그 뒤의 기억의 발현에 관계 없이 기분이 우울할 때가 있는가 하면, 가을이 되어 이 음습한 곳으로 염두가 뿌리를 내리면서 이유 없이 내내 앓기도 하였다.
어쨌든 증거는 없지만 좋고 나쁜 기분을 느끼는 것도 염두라고 믿는다. 이 염두에 닿아있는 단면만을 일컬어 ‘감정’ 또는’기분’이라고 이르고 싶다. 무언가를 아는 것은‘염두’ 또는 ‘의식’이고 염두에 포착되지 않는 통증은 실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분 그 자체는 염두의 위에 일어나는 공연물은 아니다, 염두에 공연이 일어날 때 공연물과 독립되어 일어나는 울림 같은 것이다. 육체의 통증과 쾌감이 염두에 닿아 이 부차적인 감정의 울림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감각(感覺)은 기본적으로 기분에 직결(直結)되어 있는 석가래 같은 것이다. 염두에 이 복잡한 주제를 올리고 떠오르는 온갖 단어들과 관념들, 그리고 상황을 상정해 보지만 ‘기분’문제는 간단히 이해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너무 늘어진 잡동사니 같기도 하고 너무 얽힌 실타래 같기도 하다. 다시 입소할 기회가 온다면 더 탐구하기로 하고 ‘내 안의 슬픔은 현재적으로 존재하지만 슬픈 기억이라는 것은 없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쯤 해서 오후 사색을 마무리 하였다.
저녁 시간에 추가적으로 정리한 몇 가지 내 안의 ‘정서’ 또는’기분’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의 모든 기억은 기본적으로 기분이라는 소재로 염장(鹽藏)이 되어있다. 기억들이 회상되면 그 간이 느껴진다. 염장은 소금뿐 아니라 꿀이 첨가되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들 역시 이진수적인 코드이다. 기억에 붙은 정서는 과거의 것이 아니고 현재적인 것이다. 기억이 염두에 오르면 그 기억에 붙은 정서의 비밀코드가 현재의 정서반응을 일으킨다. 과거의 각인이 염두에 현재적인 준비된 소품을 올리는 것과 같이 기억은 이 부속의 코드를 통해 현재의 고통과 번뇌를 자극한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살아있는 분화된 기호(嗜好)가 있을 뿐이고 번뇌는 존재하지 않는다. 슬픔이 마비된 사람에게는 아무런 기억도 슬픔을 유발하지 못할 것이다. 싸이코패스는 이 기호가 망가진 환자이다. 슬픔의 물꼬가 터진 사춘기 소녀는 무엇을 접해도 슬프다. 이와 같이 기분은 기본적으로 육체의 산물인 것 같다. 그러니 과거의 기억이 어떤 정서를 일으켜 내는 정도는 그것을 경험할 때 각인된 정서의 코드뿐 아니라 현재의 번뇌가 일어나는 육신의 상태에도 의존한다. 슬픔이 현존하는 것이고 슬픈 기억이라는 것은 없다는 오후의 가설에 점점 심증이 굳어갔다.
그렇다면 슬픔과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건강해 지는 것이다. 슬픔은 육체적이고 현재적이기 때문이다. 부득이한 슬픔의 러시는 염두에 몰려오는 연주의 코드를 끊어내면 된다. 나는 젊어서부터 나쁜 일이 생각나면 아주 밝고 샛노란 커다란 해바라기를 염두에 떠올리곤 했는데 기분을 전환하는데 꽤 효과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나쁜 감정 대신 밝은 해바라기의 화려함에 염두가 몰두되어 좋은 기분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감옥의 간수인 신부님은 그 길목에 쓰레기통이나 용광로 같은 것을 놓고,‘ 버리는 데서 오는 후련한 기분’을 엮거나, 용광로의 뜨거움을 넣어 그 뜨거운 기분으로 기억에서 오는 번뇌의 발동을 막을 것을 권장하고 있었다. 신앙인이 그 자리에 신(神)을 넣고 기억에서 오는 감정의 물꼬를 바꾸는 것도 권장되었다.
마지막 날의 기록
투옥의 막일은 실제로 시건 된 개인 감방의 옥문을 풀어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문이 열릴 때까지 나는 지난 시간 관찰한 내 머릿속의 생각과 관념의 덩어리 속에서 내가 세상에 가지고 나온 것과 내가 자라고 배우고 늙으면서 쌓아 모은 것들을 분류해 보기로 하였다.
내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나온 내 유년의 밑천은 염두와 정밀하게 분화된 신경다발, 그리고 염두에 붙어 자라날 관념과 기분의 얼마 되지 않는 씨앗뿐이었다. 이 씨앗들은 정말 굵직한 본능의 몇몇 골짜기로 그 뿌리가 향해 있었다.
나의 염두는 태초에도 비어있는 공간(무대)이었고 내가 생존해 있는 지금도 역시 그 대부분 비인 상태로 존재한다. 나의 의식과 자아는 상시의 실체적 존재가 아니며 명멸하는 조명이나 불빛 같은 것이다. 그 염두에 공연이 일어날 뿐이고, 소품을 마련하고 배우고 경험하면서 염두 끝의 뿌리들이 고구마 줄기 자라듯 자라나 기억을 각인하고 다발로 묶여 말을 만들고 염두에 소품들을 올리는 골의 틀을 만들어왔다. 이 단출한 염두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을 기질과 생리 외의 나의 모든 것은 곧 나의 육체라는 비약적인 결론을 내고 스스로 놀라워한다. 나의 의식과 영혼은 실체를 갖지 않는 종속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고 내가 성장하고 살아오는 동안 나의 염두에 붙어 있던 씨앗들은 뿌리를 뻗어 나의 생각과 지식과 번뇌를 만들어 왔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나의 육신이 세상에 적응하며 먹을 것을 찾고 활동하고 삶을 영위하는데 기여하도록 이루어져 왔다. 나의 의견과 생각은 결국 내 안에 묻어 있는 무언가의 흔적이거나 차용물이지 나 자신의 아니며, 기질과 육체만이 나 자신이고 고유하고 개별적이다. 덧붙여, 정신과 생각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비개별적이고 단체적인 것에 불과한 무위의 것이라는 것이 이번 수양을 마치며 내린 잠정적 결론이었다.
맛있고 건강한 점심을 먹고 출소를 준비하였다. 입소 첫날부터 나를 지배한 두 가지의 키워드는 속박과 자유였다. 속박이 내내 불편했고 자유가 너무 그리웠다. 몸이 시설과 스케줄에 묶이니 그간 내가 묶여 살아온 현실에서 격리되는 불편함이 매우 낯설었는데, 그 대신 이 새로운 구속은 나의 영혼을 아무 잡을 것 없는 허전함에 빠뜨렸다. 옛날 생각을 하지 않고 이 무료함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아침 나절에 다다른 결론에 따르면, 원래 정신은 육체가 현실을 견디는데 기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다. 나는 지난 오일 동안 나의 육체를 시설에 묶고 임무가 해제된 정신의 거동을 살펴본 셈이 됐다. 내가 지난 오일 그리워한 것은 육신의 자유였고, 빨리 나가고 싶었고 쇼핑몰에서 한가하게 커피도 먹고 싶었다.
나의 염두는 옥외(獄外)의 삶에서 평소와 늘 같은 미션을 수행하겠지만 이번에는 가능한 한 틈틈이 ‘깊이 생각해 보면서’ 능률적이고 더 치열하게 해보고 싶다. 아마 차분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키워드가 떠오르면 행복공장에 다시 들어와 무대의 재정비를 할 필요가 생기기도 할 것이다. 나의 생각들이 그 간 내가 내 안에 쌓아놓은 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상 가끔은 짐 정리도 할 값어치가 있는 것이라고 느낀다. 더불어 ‘나’, ‘자아’ 또는 ‘나의 생각’이라는 관념에 묶여 있던 ‘나’의 무위적인 실체를 깨닫고 나니, 내 안에서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못된 ‘포주’를 뽑아내 버린 홀가분한 느낌도 든다.
출소를 하고 나의 육신은 그렇게 갈구하던 자유를 되찾았다. 휴가를 즐긴 나의 영혼은 그 본래의 임무에 더 충실히 봉사할 새로운 힘을 얻었다. “영혼의 진정한 자유는 아무리 소박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해도 주어진 삶에 더 본성적이고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데서 온다".
번뇌로 불행해져 행복을 갈구하는 사람뿐 아니라, 현실의 삶에 필요한 생각거리를 가진 사람들은 업무, 가정, 사회에 관한 무엇이든 행복공장의 옥문(獄門)을 열고 들어가, 차분히 그 주제어와 치열하게 대면해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