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오마이뉴스] 연극 통해 새식구 만난 '기지촌 할머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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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희(가명) 할머니의 어린 시절 사진 | |
ⓒ 햇살사회복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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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이덕희(가명) 할머니가 안정리(경기도 평택시 소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만 62세. 아직 세상을 떠나기엔 많지 않은 나이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그는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육남매의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었다. 오빠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그녀는 밭을 매고, 소에게 풀을 먹였다. 여린 손발이 벌겋게 짓이겨질 때까지 일해도 혼이 나기 일쑤였다. 복숭아나무 묶음이 부러질 때까지 맞았다. 그래서 그는 15살 나이에 집을 나왔다.
군산에서 식모살이부터 시작해서 서울로 왔다. 중간에 가족에게 잡혀 들어가기도 했지만 다시 도망쳐 나왔다. 서울에서 살기에 그는 아주 어렸고,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도 식모살이와 버스 안내원을 하며 자리를 잡았다.
20살이 좀 넘었을 때 친구가 평택에 아는 언니네 놀러 가자고 해서 내려갔다. 클럽과 미군이 많은 그곳은 안정리였다. 사흘 동안 친구가 아는 언니의 집에 있었다. 친구는 그 사이 도망갔다. 집주인은 포주였다. 포주는 사흘 동안 먹고 잔 값을 내놓으라고 했다. 50원도 없는데 5만 원을 요구했다. 포주가 집에 연락했지만, 집에서는 돈을 보내주지 않았다.
45년 동안 산 안정리서 죽으려 했지만 죽지 못했다
안정리에 온 여성들은 그렇게 '기지촌 여성'이 됐다. 사람들은 그들을 '양공주'라 불렀다. 포주들의 장부에 오른 기지촌 여성만 500명이 넘었다. 어느 누구는 기지촌 여성이 모두 2000명이라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3000명이라고 했다. 그들은 돈이 없어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포주에게 돈을 갚기 위해, 클럽에서 미군을 유혹해 돈을 벌었다. 파라다이스, 유엔, 폴리, 피콕, 아리랑 등 수없이 많은 클럽이 생기고 없어졌다. 세븐 클럽이 제일 잘 나갔다.
몸이 아파도 포주는 일을 시켰다. 포주는 그들에게 강제로 마약을 먹였다. 아픈 줄도 모르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성매매를 했다. 나라에서는 보건소를 통해 그들의 성병을 관리했다. 그리고 그들을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 칭했다.
▲ 연극 <숙자이야기> 공연 중 춤을 추는 할머니들, 무대 뒤에는 기지촌 할머니의 젊은 시절이 투영되고 있다. | |
ⓒ 이성주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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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덕희씨는 죽고 싶었다. 농약을 먹었다. 두 번의 자살시도에도 살아났다. 농약을 한 번 더 먹으면 죽지는 못하고 바보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죽기를 포기했다. 대신 악착같이 살았다. 다른 색시들은 미군을 만나 빚을 갚았다. 하지만 그는 포주에게 진 빚을 식당 일로 갚아나갔다.
자신을 내친 가족들의 뒷바라지까지 하며 살아온 그는 1999년 유방암에 걸렸다. 그는 종종 "죽으려고 먹었던 약이 몸속에 남아 암이 된 것 같다"고 했다.
덕희씨는 할머니가 돼서도 안정리를 떠나지 못했다. 고향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고 세상은 그를 이해해주지 않았다. 바로 옆 동네인 송탄에 가는 것도 무서웠다. 그는 다른 안정리의 할머니들처럼 섬 같은 단칸방에서 살았다.
그런 그가 연극단체 '행복공장'의 노지향씨를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노씨는 기지촌 여성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기 위해 할머니들을 만나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45년 간 가슴 속 깊이 숨겨놓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노씨와 기지촌 할머니들의 대화는 '기지촌 할머니 힐링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업인 연극 <숙자이야기>로 이어졌다.
"죽기 전에 미국은 못가도... 제주도 한 번만 데려가줘"
지난 2012년 7월과 10월, 덕희씨는 기지촌에서 함께 생활했던 동료들과 연극 <숙자이야기> 무대에 올랐다. 그는 공연 당시 자신을 평생 안정리에서 살게 만들었던 포주를 연기했다.
연기 연습이 막 시작됐던 지난 2012년 4월 어느 날 문득 덕희씨는 함께 공연을 준비하던 유인경 햇살사회복지회(이하 햇살) 간사에게 물었다.
"간사, 있잖아 나 제주도 한 번만 데려다주면 안 돼?"
유 간사는 "보내주고 싶은데 경비 마련이 쉽지 않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제주여행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나 죽기 전에 한 번만 데려가줘. 미국은 못가도 제주도 한 번만 데려가줘. 갈 수 있을 때 데려가줘. 이러다 제주도도 못가고 죽겠어."
그는 이미 1년 전 몸속 암이 재발한 것을 알고 있었다. 햇살 사람들이 돈을 모아 지난 2012년 5월 2일부터 4일까지 덕희씨와 친구 한 분을 제주도에 보내드렸다. 이후 덕희씨는 <숙자이야기>공연에 2회 더 출연한 뒤 지난 1월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 <숙자이야기>에서 안정리 할머니의 장례식 장면을 연기하는 할머니들의 모습. | |
ⓒ 햇살사회복지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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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지막은 기지촌 친구들과 함께였다. 한 평생을 혼자서 꾸역꾸역 살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기 9개월 전 그에게는 35명의 식구가 생겼다. 2012년 4월부터 함께한 연극팀이 바로 그들이었다. 연극팀 식구들은 자신을 버린 가족보다 가까웠고 고향보다 따뜻했다.
지난 2012년 7월 10일 공연 전에 안정리에 거주하시던 다른 할머니 한 분이 눈을 감았다. 올해 5월에도 한 분의 할머니가 세상을 떴다. 이렇게 안정리 할머니들이 한두 명씩 세상과 이별하고 있었다. 평생 고생만 한 할머니들은 제주도 가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런 할머니들에게 덕희씨가 선물을 남겼다. 7월 10일로 계획된 제주도 여행이 그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경기도여성발전기금에서 <숙자이야기> 연극 활동의 일환으로 제주도 항공비를 후원했다. 햇살의 원장과 직원들도 후원금과 자비를 모아서 제주도 여행경비를 보탰다. 이렇게 두 번째 '기지촌 할머니 힐링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고향의 아픔을 추억으로 바꿀 '고향찾기 프로젝트'
유인경 햇살 간사는 제주도 여행경비 모금은 두 달 만에 이뤄졌다고 했다. 유 간사는 "올해 4월 이덕희 할머니의 사연을 접한 극단 '해인'에서 할머니들의 항공비를 선물하면서 금액 모금이 시작됐다"며 "2개월 동안 10명이 후원했고 아는 분들이 특별모금을 벌였다"고 전했다.
7월 10일부터 12일까지 진행되는 제주도 여행에는 할머니 스무 분 남짓과 할머니를 모실 스태프까지 30명이 넘게 참여한다. 하지만 할머니 모두를 모시고 가기에는 아직 돈이 많이 부족한 상황. 햇살은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서라도 할머니들에게 제주도 여행을 선물할 계획이다.
▲ 지난 3일 <숙자이야기> 공연 후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는 할머니들과 햇살 관계자, 연극팀. | |
ⓒ 심명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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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추석 이후에는 할머니들이 고향을 찾는 두 번째 힐링프로젝트도 진행된다. 모두 연극 <숙자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할머니들은 연극을 통해 자신의 숨겨온 고통을 마주했고 치유에 나설 수 있었다. 남은 할머니들을 모시고 목포에 들렀다 익산과 부여를 돌아 안정리로 돌아올 계획이다. 비록 할머니들을 불러주지 않는 고향이지만, 당당하게 가서 옛 모습을 추억할 생각이다.
햇살은 2002년 만들어져 평택 안정리의 기지촌 할머니들의 정착과 치유를 돕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의 후원을 받지 않고 프로젝트로 운영되기 때문에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햇살이 속한 기지촌인권연대는 올해 6월부터 김광진 민주당 의원과 함께 기지촌 할머니들을 위한 법안을 만들고 있다. 지난 6월 12일 사전 간담회를 열었고, 올해 가을에는 공청회를 열 예정이다. 평택미군기지 확장으로 땅값이 올라 쫓겨날 위기에 처한 할머니들의 주거 대책과 생활안정지원금을 개선하는 문제를 논의한다.
출처 : http://omn.kr/2795